원고 청탁을 받고 제출한 글 제목은 몹시 거창했고, 마감일 안에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거대한 문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 속도 모르고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을 지켜보면서 더는 부담감을 키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평소 독려의 귀재라 일컬어지는 김유승 편집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투고가 좀 늦을 수 있단 소리를 이런저런 애로사항들로 늘어놓고 있는 나에게 편집장님이 한마디 꺼내주셨다. “글이라는 게 짧든 길든, 사람들은 그 많은 문장들 가운데 어떤 한두 문장에 감동하고 그걸 기억하는 법이잖아요.”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세워놓은 거대한 벽이 스르륵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몇 페이지짜리 아주 멋진 완성작을 떠올려놓고서 그 앞에서 스스로 기가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벽을 쳐다도 못 보게 너무 크고 높게 만들어놨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문장’은 나의 키보다 낮은 아담하고 친근한 벽으로 다가왔다. 문장 하나를 완성도 있게 공들여 빚어 온점으로 마치는 일은 해볼만 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나를 그렇게 해놓으면 그다음 문장도 이와 같이 만들어서 그뒤에 놓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글 하나가 어느새 완성돼 있겠지 하면서. 이렇게 용기라는 에너지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느낌은 조금 오랜만이었다.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온 이후 하루하루 뭔가 거대함에 치였던 것 같다. 내가 속한 곳들이나 우리나라 안의 문제들도 더없이 거대해 보였는데 국가를 막론하고 인류 전체에게 문제를 던지는 자연의 힘이란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도 무척 작은 존재이지만 그땐 인류라는 무리마저 작아 보였다. 끝이 없어 보이는 거대함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지치는 가운데서도 어디서 용기를 내었던 걸까 생각해보면, 주변 사람들과 올바른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을 자주 하는 일상적인 습관을 같이 쌓아간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서로 간의 미세하면서 찬찬했던 연결들 또한 보탬이 된 것 같다.
《이머전스》(김영사, 2004)라는 책을 펼치면 점균류의 무리 행동뿐 아니라 인간 몸 안의 75조 개 세포들의 상호작용, 그리고 1만 마리 개미들의 군집사회 이야기가 나온다.
“각 세포는 어떻게든 설계도면상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만 세포도 개미처럼 전체를 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나올 때 편지봉투처럼 주소가 적히거나 공장의 일련 번호 같은 것이 찍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포는 자신이 속한 유기체를 보지 못하는 대신 세포 연접을 통해 전달되는 다른 세포의 신호로 거리차원에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것이 자기 조직화의 비결이다. 즉 각 세포는 이웃 세포를 보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세포 집합체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신호는 이른바 ‘유전자 발현’을 직접적으로 통제한다. 각 세포는 이웃 세포들의 신호를 보고 DNA의 어느 부분에서 정보를 얻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때문에 신호는 세포의 커닝 페이퍼와 다름없다. 그것은 미세한 집단심리와도 같다. 세포는 주위의 세포들이 열심히 고막이나 심장 판막을 만드는 것을 보고 똑같은 일을 하기 시작한다.”(93-94쪽)
그러니까 전체를 완벽하게 파악한 개체들만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체를 향한 눈을 항시 열어두면서 주변에서 오는 신호, 즉 ‘필요’라는 싸인을 읽고 반응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거대한 전체는 애초에 볼 수도 없고 그만큼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거대함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핑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사회 전체가 실제로 거대해지거나 거대해 보일수록 더욱 에너지장을 낮고 넓게 펼쳐 자신의 주변 가까이를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주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필요가 있을지를 살펴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애쓰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2019년 겨울즈음에, 한국아나뱁티스트출판사(KAP) 발행인으로도 계셨던 김복기 선생님께서 ‘평화저널’을 만들고자 편집장과 위원들을 모으고 계시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분도 분명 주변으로부터 어떠한 필요를 감지하여 자기 행동을 결심하신 것일 테고, 평화활동가이면서도 이전에 짧게나마 출판 경험이 있던 내게도 그 신호가 또한 필요로 읽혔다. 머리로는 내가 하면 안 되는 이유들을 계속 떠올리는데 뭔지 모를 어둠 속 강렬한 빛 같은 이미지가 다가왔고, 마음이 출렁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이미 그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스스로가 보았다. ‘무엇을 어떻게’는 그다음이다. 일단 마음을 그곳에 갖다놔보는 것이다.
평소 나는 평화라는 가치를 좀 더 일상화하는 활동들에 지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을 항시 살피며 상호작용 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신호라는 것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가 레이더망을 열고 펼치고 있는 것이 먼저이면서 중요한 일이겠다. 그저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약간 있는 것도, 주변 소식지나 SNS를 한번 더 열어보는 것도 큰 방법이 되는 것 같다.
아쉽게도 <평화저널 플랜P>가 이번에 완간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도 어떠한 갖가지의 필요에 따랐을 것이고, 이번 결정은 또 다른 필요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되는 긍정적 작용이 되어줄 것이라 본다. 이러한 변화뿐 아니라 또 다른 어떤 필요의 신호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를 계속 살피면서, 평화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해질 때까지 내 안의 감각들을 또 한번 열어놓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데 이 큰 사랑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을까. 네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라고 루미가 남긴 짧은 시가, 어쩌면 거대한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큰 가르침이 되어주는 듯하다.
- 끝 -
( 상세 보기 : 평화저널 플랜P (peacejournal.co.kr) )
원고 청탁을 받고 제출한 글 제목은 몹시 거창했고, 마감일 안에 글을 쓰는 일이야말로 거대한 문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 속도 모르고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을 지켜보면서 더는 부담감을 키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평소 독려의 귀재라 일컬어지는 김유승 편집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투고가 좀 늦을 수 있단 소리를 이런저런 애로사항들로 늘어놓고 있는 나에게 편집장님이 한마디 꺼내주셨다. “글이라는 게 짧든 길든, 사람들은 그 많은 문장들 가운데 어떤 한두 문장에 감동하고 그걸 기억하는 법이잖아요.”
순간 머리가 맑아지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세워놓은 거대한 벽이 스르륵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몇 페이지짜리 아주 멋진 완성작을 떠올려놓고서 그 앞에서 스스로 기가 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벽을 쳐다도 못 보게 너무 크고 높게 만들어놨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문장’은 나의 키보다 낮은 아담하고 친근한 벽으로 다가왔다. 문장 하나를 완성도 있게 공들여 빚어 온점으로 마치는 일은 해볼만 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나를 그렇게 해놓으면 그다음 문장도 이와 같이 만들어서 그뒤에 놓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글 하나가 어느새 완성돼 있겠지 하면서. 이렇게 용기라는 에너지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느낌은 조금 오랜만이었다.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온 이후 하루하루 뭔가 거대함에 치였던 것 같다. 내가 속한 곳들이나 우리나라 안의 문제들도 더없이 거대해 보였는데 국가를 막론하고 인류 전체에게 문제를 던지는 자연의 힘이란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도 무척 작은 존재이지만 그땐 인류라는 무리마저 작아 보였다. 끝이 없어 보이는 거대함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지치는 가운데서도 어디서 용기를 내었던 걸까 생각해보면, 주변 사람들과 올바른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을 자주 하는 일상적인 습관을 같이 쌓아간 덕분이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서로 간의 미세하면서 찬찬했던 연결들 또한 보탬이 된 것 같다.
《이머전스》(김영사, 2004)라는 책을 펼치면 점균류의 무리 행동뿐 아니라 인간 몸 안의 75조 개 세포들의 상호작용, 그리고 1만 마리 개미들의 군집사회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니까 전체를 완벽하게 파악한 개체들만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전체를 향한 눈을 항시 열어두면서 주변에서 오는 신호, 즉 ‘필요’라는 싸인을 읽고 반응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거대한 전체는 애초에 볼 수도 없고 그만큼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거대함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핑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사회 전체가 실제로 거대해지거나 거대해 보일수록 더욱 에너지장을 낮고 넓게 펼쳐 자신의 주변 가까이를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주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필요가 있을지를 살펴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애쓰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2019년 겨울즈음에, 한국아나뱁티스트출판사(KAP) 발행인으로도 계셨던 김복기 선생님께서 ‘평화저널’을 만들고자 편집장과 위원들을 모으고 계시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분도 분명 주변으로부터 어떠한 필요를 감지하여 자기 행동을 결심하신 것일 테고, 평화활동가이면서도 이전에 짧게나마 출판 경험이 있던 내게도 그 신호가 또한 필요로 읽혔다. 머리로는 내가 하면 안 되는 이유들을 계속 떠올리는데 뭔지 모를 어둠 속 강렬한 빛 같은 이미지가 다가왔고, 마음이 출렁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이미 그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스스로가 보았다. ‘무엇을 어떻게’는 그다음이다. 일단 마음을 그곳에 갖다놔보는 것이다.
평소 나는 평화라는 가치를 좀 더 일상화하는 활동들에 지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을 항시 살피며 상호작용 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신호라는 것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가 레이더망을 열고 펼치고 있는 것이 먼저이면서 중요한 일이겠다. 그저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약간 있는 것도, 주변 소식지나 SNS를 한번 더 열어보는 것도 큰 방법이 되는 것 같다.
아쉽게도 <평화저널 플랜P>가 이번에 완간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도 어떠한 갖가지의 필요에 따랐을 것이고, 이번 결정은 또 다른 필요에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되는 긍정적 작용이 되어줄 것이라 본다. 이러한 변화뿐 아니라 또 다른 어떤 필요의 신호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를 계속 살피면서, 평화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명확해질 때까지 내 안의 감각들을 또 한번 열어놓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데 이 큰 사랑이 어떻게 내 몸 안에 있을까. 네눈을 보아라. 얼마나 작으냐? 그래도 저 큰 하늘을 본다.’라고 루미가 남긴 짧은 시가, 어쩌면 거대한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큰 가르침이 되어주는 듯하다.
- 끝 -
( 상세 보기 : 평화저널 플랜P (peacejournal.co.kr) )